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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연설처럼 퍼진 영상, 원본을 재생하자 말투가 달라졌다

자산맥 읽는 시간 약 13분

2019년 5월, 미국에서 한 정치인의 연설 영상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영상 속 인물은 당시 미국 하원의장이었던 낸시 펠로시였다.

말이 평소보다 느렸다.

일부 단어는 늘어졌고 발음도 어눌하게 들렸다.

영상만 보면 술에 취했거나 정상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상태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실제로 영상은 그런 인상을 강조하는 설명과 함께 소셜미디어에서 확산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영상 속 장면 자체는 가짜가 아니었다.

펠로시가 실제로 한 연설이었다.

얼굴을 다른 사람에게 합성한 것도 아니었다.

존재하지 않는 말을 AI로 만들어 넣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랐을까.

원본 영상을 재생해보자 답이 나왔다.

가짜 장면이 아니라 진짜 영상을 느리게 만든 것이었다

문제가 된 영상의 원본은 2019년 5월 22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행사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C-SPAN에는 당시 펠로시가 연설하고 질문에 답하는 영상이 남아 있다.

C-SPAN 원본 영상 – Speaker Pelosi Remarks at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원본을 보면 소셜미디어에서 퍼진 영상과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즉 사건 자체를 다른 장소에서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생 속도가 달랐다.

워싱턴포스트가 영상 전문가들과 함께 분석한 결과, 확산된 영상은 원본의 약 75% 속도로 느려져 있었다.

단순히 영상 전체를 느리게 만들면 목소리의 음높이도 낮아져 금방 편집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문제의 영상은 음높이까지 조정돼 있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슬로모션 영상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었다.

The Washington Post – Faked Pelosi videos, slowed to make her appear drunk, spread across social media

75%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작은 차이처럼 보였다

원본의 75% 속도.

처음에는 이 정도 차이가 사람의 인상을 크게 바꿀 수 있을까 싶었다.

두 배 느리게 만든 것도 아니다.

영상 프레임을 조작해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만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말에서는 작은 속도 차이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말 사이의 간격이 길어진다.

단어가 늘어진다.

발음이 평소보다 뭉개진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표정 변화 역시 조금 느려진다.

여기에 음높이까지 자연스럽게 보정되면 시청자는 영상이 느려졌다는 사실보다 화자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인상을 먼저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워싱턴포스트가 인용한 영상 분석에서도 이 조작 방식이 사람을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었다.

영상에 담긴 모든 픽셀이 가짜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진짜 영상도 재생 방법을 바꾸면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딥페이크가 아니다’와 ‘조작되지 않았다’는 같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이 영상은 딥페이크 논쟁과도 연결됐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보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딥페이크와는 달랐다.

AI가 얼굴을 합성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을 펠로시가 한 것처럼 새로 만든 것도 아니었다.

기존 영상의 재생 속도를 바꾼 비교적 단순한 편집이었다.

이런 유형은 흔히 cheapfake 또는 shallowfake라고 불린다.

고도의 생성형 AI 기술 없이 기존 영상의 속도, 순서, 자막, 화면 일부 등을 바꾸는 방식이다.

오히려 이 점 때문에 영상 검증에서 한 가지 질문이 더 필요해진다.

“이 영상은 실제 촬영된 것인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이번 영상은 실제 촬영된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보고 있는 영상이 원본과 같은 방식으로 재생되고 있는가?”

원본을 찾자 비교할 기준이 생겼다

조작 영상을 그것만 놓고 보면 이상한 부분을 찾아내야 한다.

이 방법은 쉽지 않다.

영상 편집에 익숙하지 않다면 말투가 원래 그런 것인지, 영상이 느려진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원본을 찾으면 문제가 달라진다.

두 영상을 같은 장면에서 비교할 수 있다.

입 모양이 같은가.

말의 내용이 같은가.

재생 시간이 같은가.

말하는 속도가 같은가.

앞뒤 문장이 같은가.

화면이 잘려 있지는 않은가.

원본이 생기는 순간 추측이 아니라 비교가 가능해진다.

이번 사례에서도 원본 C-SPAN 영상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 연설 속도와 확산된 영상의 속도를 대조할 수 있었다.

영상 검증에서 원본을 찾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원본 영상도 앞뒤를 봐야 한다

속도 조작만 확인하고 끝낼 수도 있다.

하지만 영상 검증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영상이 원래 속도로 재생되고 있어도 앞뒤를 잘라내면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그 정책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년간의 데이터를 본 뒤 제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여기서 첫 문장만 잘라내면

“그 정책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는 영상이 된다.

목소리도 진짜다.

얼굴도 진짜다.

재생 속도도 정상이다.

하지만 원래 발언이 전달한 의미와는 다르다.

따라서 원본 확인에는 두 가지가 포함된다.

원래 파일인가.

그리고

원래 맥락인가.

둘 중 하나만 확인해서는 부족하다.

짧은 영상이 길어지자 질문 자체가 달라졌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짧은 영상이 유리하다.

몇 초 안에 의미가 전달돼야 한다.

그런데 검증에서는 반대로 짧다는 사실이 위험 신호가 될 수 있다.

10초짜리 발언이 있다면 원래 영상에서 앞뒤 30초나 1분을 더 보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면 질문부터 확인한다.

토론 영상이라면 상대방의 직전 발언도 본다.

기자회견이라면 기자가 정확히 무엇을 물었는지 확인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같은 영상에서 전혀 다른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정말 이런 말을 했나?”

를 확인했다면,

원본에서는

“이 말을 어떤 질문에 대한 답으로 했나?”

를 확인하게 된다.

영상의 진위를 넘어 의미를 검증하는 단계다.

자막도 원본과 별개로 확인해야 했다

영상 자체가 조작되지 않았어도 자막이 문제일 수 있다.

외국어 영상에 번역 자막이 붙으면 대부분의 시청자는 원래 음성을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

이때 화면은 완벽한 원본이어도 자막 한 줄이 의미를 바꿀 수 있다.

특히 짧은 영상에서는 자막이 영상보다 더 강하게 내용을 규정한다.

실수 인정

분노

충격 발언

같은 문구가 먼저 보이면 시청자는 그 틀 안에서 장면을 해석하기 쉽다.

따라서 중요한 영상이라면 자막도 영상과 분리해서 본다.

원문 발언을 찾는다.

공식 녹취록이 있다면 대조한다.

자동 번역만 있는 경우에는 중요한 문장을 다른 번역 자료와 비교한다.

결국 영상 검증은 화면만 보는 일이 아니었다.

같은 영상이 다른 설명과 함께 다시 퍼질 수도 있다

영상의 또 다른 특징도 있다.

몇 년 전 촬영된 영상이 오늘 벌어진 사건처럼 다시 올라올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영상 내용도 진짜이고 재생 속도도 정상이다.

앞뒤 맥락도 크게 잘리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날짜가 틀렸다.

3편에서 사진의 원본 게시 시점을 확인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다.

영상도 최초 게시일과 원본 업로드 시점을 확인해야 한다.

유튜브나 공식 기관의 영상 페이지가 있다면 게시 날짜를 본다.

방송 영상이라면 당시 보도 자료를 찾는다.

행사 이름이 있다면 실제 개최 날짜를 확인한다.

소셜미디어 게시물의 날짜가 곧 촬영 날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업로드된 영상이 오늘 촬영됐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원본을 못 찾았다고 바로 가짜라고 할 수도 없다

여기서도 판단의 선이 필요하다.

검색했는데 원본 영상을 찾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바로

“이 영상은 가짜다.”

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원본이 공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검색어를 잘못 사용했을 수도 있다.

오래된 방송 영상이라 검색에 잘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공식 계정에 올라온 영상이라고 해서 편집되지 않은 전체 원본이라는 보장도 없다.

공식 홍보 영상 역시 일부 장면만 편집해 공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본을 찾지 못했다면 가장 정확한 표현은

“현재 확인 가능한 자료만으로 원본을 확인하지 못했다.”

에 가깝다.

확인하지 못한 것과 거짓으로 확인된 것은 다르다.

영상 20초를 보면 이제 세 가지를 확인한다

짧고 강한 영상을 만나면 바로 내용부터 판단하기 쉽다.

하지만 이번 사례를 따라가면서 확인 순서를 조금 바꿀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출처다.

누가 처음 올렸는지 찾는다.

가능하면 방송사, 정부기관, 행사 주최자, 원 촬영자처럼 원본에 가까운 곳까지 이동한다.

두 번째는 재생 상태다.

속도가 바뀌었는지, 장면 순서가 달라졌는지, 중간이 잘렸는지 비교한다.

세 번째는 맥락이다.

앞뒤 발언을 본다.

질문이 있다면 질문부터 듣는다.

영상이 촬영된 날짜와 장소도 확인한다.

이 세 가지를 확인하고 나면 처음 본 20초짜리 영상의 의미가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원본이 짧은 영상의 내용을 뒷받침한 것이다.

반대로 전혀 다른 의미가 나타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라고 미리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75% 속도로 바뀐 영상이 보여준 것

펠로시 영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75%라는 숫자였다.

엄청난 영상 합성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기존 영상을 조금 느리게 만들고 음높이를 조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상태에 대한 인상은 크게 달라졌다.

이 사례를 보고 나면 영상에서 진짜라는 말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면은 진짜일 수 있다.

발언도 실제일 수 있다.

촬영 장소도 맞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보고 있는 영상이 원래 상황과 다른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이 영상 진짜야?”

라는 질문 하나로는 부족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나눠 물어야 한다.

이 장면이 실제로 촬영됐는가.

원래 속도인가.

편집 순서는 같은가.

앞뒤 맥락이 남아 있는가.

촬영 날짜는 맞는가.

붙어 있는 자막은 발언과 일치하는가.

영상 하나를 확인하는 데 질문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출발점은 의외로 단순했다.

원본을 찾아 처음부터 조금 더 재생해보는 것.

2019년 퍼졌던 영상에서도 바로 그 작업을 하자 느리고 어눌했던 말투가 달라졌다.

가짜 얼굴을 찾아낸 것이 아니었다.

진짜 영상이 어떻게 보여졌는지를 확인한 것이었다.

이번 글에서 확인한 판별 기준

짧은 영상이 강한 인상을 준다면 영상 속 장면이 실제인지 확인하는 데서 끝내지 않는다.

가능하면 최초 또는 공식 원본 영상을 찾는다.

같은 장면의 재생 속도와 길이를 비교하고 중간이 잘렸거나 순서가 바뀌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발언 영상이라면 앞뒤 부분까지 재생하고,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질문부터 확인한다.

촬영일과 게시일도 구분한다.

자막이나 게시물 설명은 영상 자체와 별개의 정보로 보고 따로 검증한다.

그리고 원본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짜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짧은 영상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결국 이것이다.

“이 20초 앞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참고한 자료

C-SPAN – Speaker Pelosi Remarks at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The Washington Post – Faked Pelosi videos, slowed to make her appear drunk, spread across social media

AP – Altered video of Nancy Pelosi distorted her speech

Reuters Institute – The rise of cheapfa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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